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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 1리 776
  • 장영찬 054-852-2649, andong2649@naver.com

장흥효 張興孝

 
  • 자 행원(行原), 호 경당(敬堂)
  • 1564 ~ 1633

역사인물 정보

1. 가계와 생애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자(字)는 행원(行原), 호(號)는 경당(敬堂)이며, 태어난 곳은 안동부(安東府) 금계리(金溪里)이다. 고려태사(高麗太師)벼슬을 지낸 장정필(張貞弼)의 후손이며, 시조(始祖)인 장정필은 888년(신라 진성여왕 2년)에 대사마장군(大司馬將軍) 원(源)의 아들로 중국 절강성 소흥부(蘇興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함께 우리나라로 망명한 그는, 930년(고려 태조 13)에 고창(현재의 안동)에서 성주(城主)인 金宣平(안동 김씨의 시조), 判官 權幸(안동 권씨의 시조)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견훤의 군대를 대파시킨 공으로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三重大匡保社壁上功臣) 태사(太師)의 벼슬에 오르고 고창군(古昌君)에 봉해졌다.

그 후로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쓰며 오늘날까지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증조는 이무(以武), 조부는 흡(翕), 부는 팽수(彭壽)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다. 경당은 처음에 첨지(僉知) 권사온(權士溫)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1녀를 두었는데, 바로 정부인 장씨다.

그 뒤에 후사가 없자 60세가 넘어 권몽일(權夢日)의 딸에게 다시 장가를 들어,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철견(鐵堅, 字: 若虛)은 호군(護軍)을 지냈다. 정부인(貞夫人) 장씨는 어릴 때부터 재주와 행실이 뛰어나 원근에 칭송이 자자했으며, 19세 되던 해에 부친의 제자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에게 출가하였다.

오직 부친의 가르침대로 경(敬)과 성(誠)을 다해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을 받들며 7남 3녀를 모두 훌륭하게 길러내었다. 자녀 중 장남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은 역시 경당의 제자로 스승의 행장을 지었고, 3남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은 사림의 천거로 이조판서의 지위에 올랐는데, 전례를 따라 어머니 장부인에게 정부인(貞夫人)의 교지가 내려졌던 것이다.


경당은 나이 12세가 되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스승으로 모시며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理)를 밝히고 몸을 닦는 것을 학문의 요체로 삼아 『소학』과 『근사록』의 공부에 한결 같이 전념했을 뿐, 과거공부와 같은 영달의 학문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와 같은 어린 제자의 독학정신을 눈여겨보았던 학봉은 “이 사람의 배움은 정력(定力)이 있으니 후일 크게 성취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나의 문생 가운데 이와 같은 인재를 얻으니, 자랑스럽다”며 경당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29세 때 (1593년)에는 양친 상을 당했으며, 33세 때에는 다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하를 찾아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한 번은 한밤중에 스승 서애 유성룡을 모시고 등불을 마주보며 ‘이(理)’자를 논한 적이 있었는데, 서애가 등불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불의 허(虛)한 곳이 이(理)인가’라 묻자 경당이 대답하기를, ‘허(虛)는 실(實)의 대(對)가 되는데, 이(理)에는 대(對)가 없으니 허(虛)로써 이(理)를 삼을 수는 없는 듯 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서애는 곧 응하여 말하기를, “허(虛)에는 허(虛)의 이(理)가 있고, 실(實)에는 실(實)의 이(理)가 있다” 라고 하였다. 이 한가지 일화만 보더라도 스승인 서애가 경당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경당은 ’喜怒哀樂의 未發‘과 ’고요한 가운데서도 모름지기 물(物)이 존재한다‘는 논리를 하나의 학설로 완성하여 정구(鄭逑, 1543~1629)에게 반복하여 변론한 적이 있었는데, 한강은 경당의 학문이 심득(心得)한 것이 있음을 깊이 탄복하였고 서로 알게 된 것이 늦었음을 탄식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37세 때는 경광서당의 당장으로 부임하였다. 여기서 그는 문인들에게 인사하는 법과 예절을 먼저 배우도록 가르쳤으며, 다음에는 사람됨이 진실하고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등 수신(修身)공부를 특히 중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자의 재능에 맞추어 공부의 진도를 차등 있게 나누어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이는 바로 오늘날의 능력별 교수법을 실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한 글자 한 글자 자세하게 풀이해주고, 한 구절 한 구절을 성실하게 가르쳐 한 구절일지라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철저한 교육을 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당은 이처럼 학문적인 방면에 오로지 자신의 정력을 쏟았을 뿐, 관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그에게 관직다운 관직이 제수될 수 없었다. 경당의 만년인 계유년(1633, 인조11) 봄에 내려진 창릉참봉(昌陵參奉)이라는 관직조차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려진 벼슬에 불과했다.

창릉참봉은 당시 그의 학행을 높이 인정한 사림의 천거로 이루어진 일인 데, 능참봉에 제수하는 임금의 은명(恩命)이 미처 당도하기 전에 경당은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그는 전형적인 처사적 생활로 일생을 마감 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가 70세였는데, 당시 그는 병석에 드러누운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정신은 더욱 초롱하였고 운명하는 날 저녁까지도 『맹자』「양심장」을 외우며 문하의 제자들에게 그 내용을 가르쳐 줄 정도로 철저한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 수십년 뒤, 안동의 사림들이 경광서원에 편액(扁額)을 하사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 청원이 받아들여져 사액(賜額)이 내려졌고, 이때 경당에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라는 벼슬이 추증되었다. 현재 경광서원에다 그의 위패를 모셔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2. 사승(師承)

영남학파는 영남출신의 사림파 학자들로 이루어진 학통이다. 이들은 ‘사림’이라는 신분적 자격으로 관직에 오른 자가 아니라, 학문과 정치적 역량으로 인해 사대부가 된 자 및 그 동류집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습화된 세대부(世代夫)나 벌열집단(閥閱集團)이 아니라 대부분 과거를 통해서 사대부의 신분이 된 전문적인 학자출신의 관료집단을 의미한다. 이들은 출신지역이 서울과 멀리 떨어진 영남지역이며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로서의 생활기반을 유지하는 한미한 지방 양반출신들로서 그들이 지닌 학문적 소양이나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사대부의 신분을 획득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학문적인 의리를 인간의 정신적 가치로 특히 존중하였다.

이와 같이 영남학파의 정신적 전통이 그러했던 만큼 의리는 영남학파의 존재이유이자 인식의 기반이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의리와 명분을 중시했으며, 또 역사적으로 수많은 의리실현의 행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이 중시한 성리학은 곧 실천궁행을 중시하는 실천도학적 성리학이었다.

영남학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역시 퇴계학파였다. 이 학파는 17세기 이후부터는 다양한 발전을 하게 되는데, 16세기에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양대산맥을 이루며 발전하였으나, 인조반정(1623) 이후로 남명학파는 쇠퇴일로의 길을 밟아 독립된 학파로서의 유지가 어렵게 되어 북인ㆍ노론으로 분산되었고, 나머지는 퇴계학파로 통합되고 말았다.

퇴계 이황의 성리학은 그의 문하생인 김성일ㆍ유성룡ㆍ정구 등에 의하여 계승되면서 각기 특색있는 발전을 보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유성룡은 두 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탁월한 경륜으로 임란이라는 7년 동안의 미증유(未曾有)의 국난 속에서 나라를 구출하여 명실공히 수기치인의 입공(入貢)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로는 학문적 관심의 다양성으로 인해 퇴계학파의 성리학도 다양하게 분기ㆍ발전되어 나갔는데, 학봉의 학맥은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장흥효→이휘일ㆍ이현일→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ㆍ이광정(李光靖)으로 이어져 나갔다.

경당은 퇴계의 학문대통을 학봉ㆍ서애ㆍ한강으로부터 이어받아 자신의 외손자인 존재(存齋)ㆍ갈암(葛庵)에게 물려주었고, 존재와 갈암은 이 학통을 다시 갈암의 맏아들인 밀암(密菴) 이재(李栽)에 물려주었으며, 밀암은 다시 외손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형제에게로 이 학통을 전승케 하여 영남학파의 줄기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학맥의 사승(師承) 관계를 살펴보면, 영남학맥이 곧 퇴계학맥의 본간이며 중추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경당 이후 대대로 가학을 계승함으로써 학문의 순수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퇴계 이후의 한국 유학계를 대표하는 명현들인 바, 그 중에서도 대산 이상정은 연구와 강론이 철저하고 독실하여 문하제자가 많기로 유명했으며, 퇴계 이후에 갈암 이현일이 정리한 주리론(主理論)을 더욱 발전시켜 퇴계학맥의 거봉을 이룸으로써 작은 퇴계, 즉 ‘소퇴계’라고 불려질 정도였다. 이러한 계통을 도표로 정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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